<헬조선에는 정신분석>
우리는 나와 남을 아우르는 이상적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던 내 일부를 수용하는 과정,
그동안 배척해 온 남을 내 세계의 일부로 동화하는 과정을 포함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과정과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는 과정 모두를
아우르는 여정'이 필요하다. - 223쪽 발췌.
"남이라는 이름으로 밀어 두었던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 224"
"침묵하는 상황, ... 소통 없이 강행하는 일방적 명령들, .. 반드시 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
바라보는 것, 배려하는 것, 듣는 것, 이해하는 것 모두 매우 구차한 과정이다.
그러나 이 구차함이 바로 성숙과 변화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 229"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을 찾아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글이 있기에 본책은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나에게!
책제목의 '헬조선'이 무슨 뜻인지 설명 조차 없는, 아는 사람만 알라는 식으로 첫장부터 시작해서 라캉을 모른다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책..
이해가도록 쉽게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정신분석 내용을 비전문가도 쉽게 전달받았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전문가가 필요했는데 많이 아쉽다.
앞 글들에서 그저 얻은 것이라고는 라캉의 그 '거울'을 깨부셔야겠다는 정도..??
찾아보니, '헬조선'이란 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대한민국이 살기 힘들고 희망이 없음을 풍자하는 말이라고 한다.
한편 의문점은 라캉, 그 '감정, 정서를 제외한 이론'(199)으로 어떻게 감정과 정서적인 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지, 이해불가다..
215쪽에 언급된 '전문가'를 들어보면, 아무래도 본책의 앞에 나오는 여러 글들은 나에게 그 '척'하는 것에 불과했음을 느끼게 되었다..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극히 일부분이였다. 마음 속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들은 나에게 그 '전문가'가 아니였다..
- ...(서략)... 전문가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위험에 처했을 때 붙들 수 있는 사람,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전문가다. 심리치료, 상담, 분석, 정신과 진료라는 길을 선택할 때 내담자와 환자는 전문가를 찾아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문 뒤에, 우리 마음의 누수를 잡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물이 새지 않는 척하며 살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 앉아 있다면 어떨까? ... - 215.
본책 마지막 장을 첫번째로 읽었어야 했다. 목차 순서가 꺼꾸로 되었더라면 더 좋았을까?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을 찾아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는 우리 모두가 '전문가가 되는 길을 걸어나가도록' 유도한다. 특히 부모, 어머니에게 자녀가 '전문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라고 권고한다(235~236).
'전문가'의 대열에 속한다는 것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며, '대양적 감성의 회복이자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238)이다.
'대양적 감성 회복'이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던 내 일부를 수용하는 과정'이자 '그동안 배척해 온 남을 내 세계의 일부로 동화하는 과정'이다(223).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을 찾아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를 읽다보면 문뜩 다양한 상황들에 대입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주변에 적용해볼 거리들이 많아서 좋았다.
- 아이를 어머니의 욕망으로 구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 즉 정답으로 제시된 구조에 대해 질문하고, 그 폐쇄 구조를 넘어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 자기만의 공간이 생긴 아이는 이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가진다. ... - 220.
- 나에 대해, 상황에 대해, 문제에 대해,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근육 자체가 소멸되어 간다. 그 아이가 커서 사람과의 관계를 즐길 수 있을까? 구조 속에서 질문하지 않는 아이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유를 획득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수동적인 자세로, 자신 없이 펼쳐지는 삶을 따라가게 된다. - 222.
- 온전한 나 자신이란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립의 반대말이다. 온전한 나 자신이 될 때 비로소 그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를 성숙한 인간이라 부른다. - 222.
- 남을 포용한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말을 듣는다는 뜻이며, 그것은 현재 '남'의 영역에 배치된 내 아이의 욕망을 읽어 내고 그와 소통하는 필수적 단계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나와 남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태를 '대양적 감성'이라 불렀다. - 222.
저자는 나와 아이에서 시작한 것을 점점 넓혀서 가족, 그리고 세상으로 관심을 넓히라 한다.
하지만 그 255쪽 글귀에서 나는 아직 가족에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사실 가족이라 명하지만 가족 아닌 가족이다. '시'가 붙은 게 어찌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랴. 남과 다를 바가 없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분 나쁜 걸 감추고 좋은 척하며 수습하고 넘어가던 일들, 진정한 소통이 전혀 없다보니 세부에 정성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던 습관, 원래 성격과 다르게 치밀한 분석과 계획이 전혀 없는 구조로 일관하며 대충 넘어갔던 그리고 넘어가고 싶었던 일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치열한 고민을 감추며 타인의 욕망을 따라만 가던 나는 과거의 어느 순간 했어야 하는 그 질문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내 욕망을 감추었지만 내 욕망은 결코 나를 잊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언젠가 지금까지의 거짓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야 말지도 모른다. 이 얼룩들을 감싸 안는 유일한 방법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 불편한 대상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대양적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데, 쉽지 않다. 철저히 통제와 조절로 막았던 내가 무너질까 두렵나? 있지도 않은 때를 기다리는 일종의 무력한 상태였나? 그곳만 가면 온전한 내 자신을 노출하지 못한 채 내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통제와 조절로 포장된 현재를 무너뜨리고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삶을 창조하라지만, 쉬워야 말이지~
통제되고 조절되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허구적 관계지만 어쩌겠는가? 쉬쉬하며 은밀히 덮으려는 모든 시도들은 반드시 그 썩은 내를 드러낸다지만 어쩌겠는가? 의식의 거짓말을 통해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진정 행복한 척하며 견디는 시간이지만 어쩌겠는가? '빈 말(empty speech)'를 하지 말고 '찬 말(full speech)'을 해야 한다는 데, 그게 쉬워야 말이지...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상황이 '폭력'이라 했으나, 과연 그럴까? 말하는 게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소통 없이 강행하는 일방적 명령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명령들에 이제는 싫증이 난다. 나는 바라보았고, 배려할 만큼 했고, 듣고자 했고,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성숙과 변화와 행복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착각이다. 내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한 채 보고, 배려하고, 듣고, 이해하려 했으니 문제인 것인가? 내 욕망을 통제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보다 한술 더 떠서 나를 더욱 더 버려야 하는 건가? 한편 그렇다고 이제와서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과연 좋을까? 나에게 그 '절멸의 방향성'이 존재하나 보다. 뭐 바뀌겠냐 싶기도 하고, 뭐 그리 대단히 새로운 일이 생기겠냐는 회의감도 든다. 괴로운 지금을 벗어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는 게 맞다. 왜냐하면 그게 한국의 문화적 상징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차한 세부를 챙기기 시작해야 한다'(233)를 실천이라도 해볼까? 과연 가능할까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는 나를 버린 듯 내 욕망을 접었다고 생각했지만 진정 나도 못버리고, 그저 불가능에 가까운 상대만을 통제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구차한 세부를 챙기기 시작해야 한다. 정신분석은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자관계라는 폐쇄적 구조를 벗어나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내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진정한 소통을 위해 대양적 감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에로스의 궁극적 목표는 나와 남이 하나가 되고 남의 일이 내 일이 되는 세상이다. ... 그 끝에서 우리는 전문가들을 만난다. - 233~234.
나는 '시'쪽만 그럴 뿐 그 외의 상황에서는 반전문가로 행동하는데, 왜 '시'에서만 그럴까? 바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까운 문화적상징물이여서 그런가? (그들도 싫은데 억지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욱더) 참으로 미스테리다~ ㅎㅎ; 헛웃음만 나올뿐...
- 전문가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스스로의 장단을 찾고 그 장단에 맞추어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이를 뜻한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같은 일 또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모든 구차하고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세부들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느린 걸음으로 기약 없는 외로운 싸움을 끝내 견뎌 내는 사람이다. ... 그들은 미흡한 세부를 덮어 대충 넘어가거나 표면만 그럴듯하게 꾸며 아무 일 없는 듯 현재의 문제를 밀어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남의 시선 안에 갇히거나 내 안에 묻혀 있지 않은 사람들, 즉 이자관계에서 벗어나 성숙한 개인은 모두 전문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진다. 그들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며 세상의 틈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내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이와 더불어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배려와 공감 속에서 그들과 관계를 맺을 것이다. 이들은 절멸의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 세상에 삶의 방향성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다. - 234~235.
<페미니즘 선언>읽으면서 아이를 잘 기르는 게 해결점이라고 생각했는데( http://blog.naver.com/yeon3710/220872077795 ),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을 찾아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글도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을 온전히 기울였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부모는 아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고 통제와 조절로써 관리하는 것은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지름길이다. 정답만 강요하면서 아이를 무한 경쟁 속으로 밀어 넣는 것 역시 그를 동일한 파국으로 안내하는 지름길로 이어진다. 그러한 교육 체계 속에서 아이가 살아가는 방향이 정해진다면, 그는 결코 자신의 외연을 넓혀 세상과 소통하는 온전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 - 235.
부모가 관리할 일은 없다. 그저 아이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지켜봐주면 되는 거다.
- 부모는 그냥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면 된다. 그렇게 전문가가 되는 길을 걸어 나가도록 지지해주면 된다. - 236.
- 내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내 아이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최선을 다해 아이의 몸짓과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그렇게 아이가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여정을 지켜봐 주어야 한다. 그것은 아이에게 삶의 방향성을 불어넣는 길이기도 하다. ... - 236.
- "나는 내 아이가 생각하게 도와주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 (아이)의 말을 듣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아이)를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아이)를 관찰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더욱 중요한 질문이다.
아이가 스스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문제를 푸는 출발점이다. ... 아이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바로 그것이 아이에게 진정한 금수저를 쥐어 주는 행위이다. 아이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아이의 욕망이 살아나도록 돕는 길이다. - 237.
한편 저자는 그렇다고 희생은 아니며, '행복한 부모'가 되라고 촉구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야' 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 '나 자신에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237).
- 통제하고 조절하려는 의식의 명령을 잠시 내려놓고 내 마음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내 아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 기울여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면 된다. 그렇게 나도, 내 아이도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대양적 감성의 회복이자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이다. - 238.
어느 세미나에서 듣기로 최고로 성공한 강의 태도는 강사가 말한 내용에 빠져 잠시 샛길로 나가 자신의 이야기와 비교하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 강의가 끝나는 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 강사가 하는 말만 그대로 듣고 나가면 들을 때만 반짝할 뿐 강의장을 나가면 허무하다고.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을 찾아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글을 읽으면서 그 성공한 강의태도를 보인 듯 싶다. ^^ 읽다 샛길로 나갔다가 읽다 샛길로 나갔다가를 반복하면서 흥미롭게 읽었다. 이 글에서 만큼은 프로이드도 라캉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이해불가도 아니였다. 이해가 쏙쏙~ ㅎㅎ
나머지 앞 장들도 그런 공감을 얻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이쯤에서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에 만족하련다.
그래도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을 찾아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글만 칭찬하면 아쉬우니 하나 더 하자면, <우리는 왜 '충분히 좋은 엄마' 또는 '사회적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글이였다. 물론 읽으려 할 당시에는 그 앞장의 글들 덕에 이해불가 짜증이 제법 나서 제목만 보고는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앞 글들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궁극적으로 그래야 하니까!'를 외쳤더랬지만.. ^^;;
- 엄마가 아이를 지탱해주는 따뜻함과 안전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좋은 엄마' 혹은 '충분히 좋은 엄마'의 역할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한다. ... 성인에게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는 이유도 바로 이 시기에 충분하게 좋은 엄마의 돌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204.
- 오늘날 우리는 아이는 물론 성인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윤리적인 국가'를 필요로 한다. 각 개인에게 충분한 심리적, 물리적 안정감을 확보함으로써 불안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 열등감과 패배의식, 격심한 경쟁, 폭력과 공격성, 기만과 부패 등 개인 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온갖 장애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안전한 엄마와도 같은 국가, '충분히 좋은 국가', '사회적 국가'를 절실히 요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208.
그 '충분히 좋은 엄마와 같은 국가'(208)가 되려면, 여성부터 '충분히 좋은 엄마'(204)가 되면서 '행복한 부모'(237)도 될 수 있게 여성이 아이를 낳고도 자기가 좋아하는 꿈을 여전히 이룰 수 있는, 여성이 살기 좋은 국가가 되어야함이 먼저라고 본다. 지극히 남성중심주의 국가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한 '충분히 좋은 엄마와 같은 국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충분히 좋은 엄마'도 없고 '행복한 부모'(특히 행복한 엄마)도 없을테니까. 부계중심의 국가보다는 모계중심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 아마 '시'쪽도 '친'쪽으로 바뀐다면 아내, 엄마, 여성으로 참 좋을텐데 말이야~ 며느리라는 단어가 불필요할 거다. 남편도 '남의 편'이란 용어로 쓰지 않게 될 거다. ㅎㅎ;
현실문화에서 서포터즈 잉문예술덕후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冊책冊 >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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